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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율법과 십일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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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8-09-05T14:18:09-06:00</published>
      <updated>2008-11-05T04:49:23-07: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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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Sam</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br /&gt;&lt;img src=&quot;./files/attach/images/67/127/lawoffreedom.jpg&quot; alt=&quot;lawoffreedom.jpg&quot; title=&quot;lawoffreedom.jpg&quot; width=&quot;239&quot; height=&quot;334&quot; style=&quot;float: right;&quot; /&gt;&quot;어떤 귀한 분&quot; 과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lt;br /&gt;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한참을 열불을 내다가 끊다.&lt;br /&gt;
&lt;br /&gt;
전화를 끊고..... 가만히...... &lt;br /&gt;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게되었는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lt;br /&gt;
&lt;br /&gt;
오직 성경...&lt;br /&gt;
구호처럼 외치지만...... 겸손은 나에게도 너무나 먼 이야기 일까..&lt;br /&gt;
하나님은 내가 천국의 영광을 보기 전에 나에게 겸손을 허락치 않으실까.....???&lt;br /&gt;
휴~~~!!&lt;br /&gt;
&lt;br /&gt;
그 &quot;어떤 귀한 분&quot;께 이메일을 쓰다.&lt;br /&gt;
장문의 편지가 되었지만...&lt;br /&gt;
십일조와 율법에 대하여 될 수 있으면 자세하게 딱딱하지 않게....&lt;br /&gt;
쓰느라고 노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amp;lt;&amp;lt; 이메일 전문&amp;gt;&amp;g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화상으로 율법과 십일조에 대하여 다룬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걸 알면서도&lt;br /&gt;
안타까움에 큰소리도 내어가며 설득하려고 했는데..&lt;br /&gt;
&lt;br /&gt;
사람의 언변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이해된다는&lt;br /&gt;
것을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lt;br /&gt;
&lt;br /&gt;
오직 믿음만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생각할 때&lt;br /&gt;
구원과 율법에 대한 지식이 구원에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지만&lt;br /&gt;
우리가 누리는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하는&lt;br /&gt;
좋은 받침돌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십일조에 관한 지식도&lt;br /&gt;
구원의 &quot;필수&quot; 조건이라기 보다는, 받은 구원을 보다 &quot;풍성히&quot; 누리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며&lt;br /&gt;
값없이 주신 그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lt;br /&gt;
&lt;br /&gt;
간단히 적어봅니다. 주의 깊게 읽어보시고 (잘난척이라고 생각하시지 마시고.. -_- )&lt;br /&gt;
성경에 부합하는 내용인지 뵈레아 사람(행 18) 들처럼 깊게 생각해보시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lt;br /&gt;
(참고구절들은 대충 썼습니다.... 시간되면 찾아보세요.... ^^ )&lt;br /&gt;
&lt;br /&gt;
네 단락에 걸쳐 쓰도록 하겠습니다.&lt;br /&gt;
1)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lt;br /&gt;
2) 십일조를 하는 우리의 자세&lt;br /&gt;
3) 그래서 어찌 할 것인가?&lt;br /&gt;
4) 결론&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lt;br /&gt;
=========================&lt;br /&gt;
&lt;br /&gt;
십일조를 보다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lt;br /&gt;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lt;br /&gt;
1) 제사법&lt;br /&gt;
2) 사회법&lt;br /&gt;
3) 도덕법&lt;br /&gt;
먼저 이것들이 무엇인가 살펴보죠.&lt;br /&gt;
&lt;br /&gt;
1) 제사법&lt;br /&gt;
아시다시피....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동물을 희생시키는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lt;br /&gt;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할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간단하게&lt;br /&gt;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동물들이 희생되었죠.&lt;br /&gt;
그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 (히브리서)&lt;br /&gt;
제사법의 그 의미와 형태를 모두 &quot;완성&quot; 하신게 되었죠.&lt;br /&gt;
&lt;br /&gt;
&lt;br /&gt;
2) 사회법&lt;br /&gt;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lt;br /&gt;
특별히 주신 법들을 말합니다.&lt;br /&gt;
예를들면, 추수를 할 때 네 귀퉁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두어라는 율법은&lt;br /&gt;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내는 법들이죠.&lt;br /&gt;
&lt;br /&gt;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으로 이 땅에 &quot;마지막 때 (요엘, 사도행전 2)&quot; 이 왔죠.&lt;br /&gt;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lt;br /&gt;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하게 나타내는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났기 때문에&lt;br /&gt;
더이상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내는 사회법들이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된거죠.&lt;br /&gt;
&lt;br /&gt;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법들도 예수그리스도가 완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lt;br /&gt;
요즘에 아무도 추수할 때 네 귀퉁이를 남겨두지는 않죠? 그러면 바보죠... ^^&lt;br /&gt;
&lt;br /&gt;
&lt;br /&gt;
3) 도덕법&lt;br /&gt;
대표적으로 십계명을 들 수 있는데..&lt;br /&gt;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것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lt;br /&gt;
타락해 버린 인간에게 어렴풋이 남아있는 &quot;양심&quot; 에 비추어 보아도 적법한 법입니다.&lt;br /&gt;
다른 어떠한 종교에서도 &quot;도둑질 해라&quot;, &quot;거짓말 해라&quot;, 혹은 &quot;부모는 멸시해도 좋다&quot; 라고 가르치지 않으니까요.&lt;br /&gt;
&lt;br /&gt;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신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우리에게&lt;br /&gt;
하나님의 백성된 삶으로 인도하시는 율법들을 도덕법이라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예수그리스도 모든 죄악을 다 사하시고 그 죄의 대가로&lt;br /&gt;
하나님의 그 크신 징벌을 받으셨음에도&lt;br /&gt;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통해서 권고하신 하나님의 백성된 삶...&lt;br /&gt;
그러므로 이러한 도덕법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자..... 그럼 여기서... 오늘의 질문.....!!!!!!&lt;br /&gt;
&quot;십일조&quot; 라는 것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요???????&lt;br /&gt;
&lt;br /&gt;
도덕법이라면 우리가 당연히 지켜야 하겠지만&lt;br /&gt;
제사법이나 사회법이라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어진 것이죠.&lt;br /&gt;
&lt;br /&gt;
성경에 십일조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살펴볼까요?&lt;br /&gt;
&lt;br /&gt;
울법으로의 십일조는 분깃을 받지 못한 제사장의 지파, 즉 레위 지파의 생활비를 위해서&lt;br /&gt;
나머지 지파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서 명령되었습니다.&lt;br /&gt;
제사장의 지파와 관련되었으므로 분명히 제사법입니다.&lt;br /&gt;
&lt;br /&gt;
&quot;아니,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지 않았느냐?&quot; 라고 물으신다면..&lt;br /&gt;
&quot;멜기세댁이 누구냐?&quot; 고 반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lt;br /&gt;
멜기세댁, 그가 바로 예수그리도가 레위지파의 혈통을 따르지 않은&lt;br /&gt;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quot;대제사장&quot; 이라고 표현하는 히브리서를 기억한다면&lt;br /&gt;
이 역시 제사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lt;br /&gt;
&lt;br /&gt;
정말 많은 목사님들이 오해하고 게신 말라기의 십일조 이야기조차도&lt;br /&gt;
말라기 기자가 예언을 하고 있는 그 대상자가&lt;br /&gt;
제사장 (실제로, 다른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로 먹고 살았던 사람들) 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lt;br /&gt;
십일조가 역시 제사법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오히려 더욱 뒷받침 해주는 것이죠..&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신약으로 넘어와 볼까요?&lt;br /&gt;
마태복음 어딘가에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lt;br /&gt;
그렇다면.... 에수님이 안식일을 지켰음으로 우리도 안식을 지켜야 하나요?&lt;br /&gt;
예수님도 유월절 마다 성전에 가셨으므로... 우리도 유월절 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나요?&lt;br /&gt;
&lt;br /&gt;
여기서 조심하지 않으면 극심한 이단이 나올 수 있습니다..&lt;br /&gt;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켰음으로 우리도 지켜야 한다.... 누굽니까? &quot;제 칠일 안식교&quot;이죠.&lt;br /&gt;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켰음으로 우리도 지켜야 한다.... 누굽니까? &quot;안상홍 증인회&quot;입니다.&lt;br /&gt;
&lt;br /&gt;
그 이단들이 왜 틀린 것일까요?&lt;br /&gt;
예수님이 했으니까, 우리도 한다는데.... 왜 이단인가요?&lt;br /&gt;
바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lt;br /&gt;
예수그리스도는 분명 &quot;구약&quot; 과 &quot;신약&quot; 의 중간시대의 사람입니다.&lt;br /&gt;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quot;신약&quot; 이 시작되는 것이죠..&lt;br /&gt;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quot;구약(예전 약속)&quot;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lt;br /&gt;
우리가 더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lt;br /&gt;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quot;장자의 회&quot;에서 제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아무리 성경구절도 도배를 해놓아도 소용없습니다.&lt;br /&gt;
예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 도 있습니다.&lt;br /&gt;
오히려 예수가 완성해놓은 율법을 이제와서 우리가 더 지키려 한다면....&lt;br /&gt;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아닐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므로..... 십일조.....&lt;br /&gt;
분명히 구약의 제사법에 해당되는 율법이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lt;br /&gt;
구약의 제사법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 되었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십일조를 하는 우리의 자세&lt;br /&gt;
=========================&lt;br /&gt;
&lt;br /&gt;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십일조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lt;br /&gt;
&quot;거짓 증언하지 말라&quot; 라는 .... 세상어디나 있는 간단한 도덕법조차 지키지 못하는 우리가&lt;br /&gt;
왜 하필 십일조에는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lt;br /&gt;
&quot;남의 것을 탐하기는&quot; 매일 하면서 &quot;십일조&quot;는 왜 이렇게 지키려고 하는 것일까요?&lt;br /&gt;
&lt;br /&gt;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lt;br /&gt;
&quot;곡갓에 채워 놓을 곳이 없도록 풍성하게 (말)&quot; 채워넣기 위해서는 아닐까요?&lt;br /&gt;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십을조를 드리면 되는것이고..&lt;br /&gt;
그 영광을 받은 하나님이 내 곳간 정도는 채워주어야 한다는....&lt;br /&gt;
&quot;지성이면 감천이다!!&quot; 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lt;br /&gt;
길거리에 자판기들도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를 주는데...&lt;br /&gt;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 십일조를 하면 뭔가 더 큰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은 아닌가요?&lt;br /&gt;
&lt;br /&gt;
이런 하나님이라면 저는 믿지 않습니다.&lt;br /&gt;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했더니 심봉사 눈뜨게 해주는 하나님이라면&lt;br /&gt;
우리의 믿음이 헛되고 헛되니 정말로.... 너무 헛되어 (전)&lt;br /&gt;
그리스도 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롬)&lt;br /&gt;
&lt;br /&gt;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lt;br /&gt;
매달 수입의 1/10 이 아니라..... 자기 전 재산의 절반을 바치고도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을 (행)...&lt;br /&gt;
&lt;br /&gt;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lt;br /&gt;
조금 더 좋은 향료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나님이 명령하시지도 않은 향을 피우다가 죽임을 당한 아론의 두 아들을 (레)&lt;br /&gt;
&lt;br /&gt;
결국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은&lt;br /&gt;
우상숭배 (출 20) 이자 하나님의 크신 진도에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그래서 어찌 할 것인가?&lt;br /&gt;
=========================&lt;br /&gt;
&lt;br /&gt;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연보를 해야하는 것일까요....&lt;br /&gt;
(&quot;헌금&quot;이란 표현보다는 &quot;연보&quot;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합니다.)&lt;br /&gt;
&lt;br /&gt;
&quot;내가 돈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 !!!&quot;&lt;br /&gt;
&quot;내가 가진 모든 돈과 건강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부분을 드린다.!!&quot;&lt;br /&gt;
이러한 마음으로 &quot;십분의 일&quot; 정도를 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quot;결국 십일조를 하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뭐 이렇게 길게 하냐?&quot; 라고 물으실지 모르지만..&lt;br /&gt;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lt;br /&gt;
&lt;br /&gt;
지키지 않아도 벌 받지 않는 법........&lt;br /&gt;
지켜도 별 이득도 없는 법....&lt;br /&gt;
그것을 행하는 것을 우리는 &quot;사랑&quot;이라고 말합니다.&lt;br /&gt;
&lt;br /&gt;
내가 돈을 하나님께 바치면.... 나는 손해죠.....&lt;br /&gt;
게다가 돈을 바쳤는데도..... 내 곳간은 채워지지 않는다면..... 더 큰 손해지요...&lt;br /&gt;
&lt;br /&gt;
하지만.... 내가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내가 돈을 의지하지 않고...&lt;br /&gt;
&quot;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quot;&amp;nbsp;&amp;nbsp;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을&lt;br /&gt;
보여주는 것이 바로 &quot;연보&quot;의 중심 사상인 &quot;사랑&quot;이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결론&lt;br /&gt;
=========================&lt;br /&gt;
&lt;br /&gt;
따분하세요?&amp;nbsp;&amp;nbsp;많은 분들이 그러시더라구요.... 신학은 어려운 것이고, 교리는 분리를 가져온다고..&lt;br /&gt;
&lt;br /&gt;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으니까요..&lt;br /&gt;
인정합니다. 신학이나 교리를 몰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누가 되지 않는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기쁨을 누리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lt;br /&gt;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아야,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것 처럼&lt;br /&gt;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성경이 말하고자 한 대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지 말이죠.&lt;br /&gt;
&lt;br /&gt;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신학과 교리니까요.&lt;br /&gt;
성경에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quot;기도해 보고...&quot; 라고 돌려버리는 것은 교만이며..&lt;br /&gt;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lt;br /&gt;
기도할 때 하나님이 직접 말해주시면 되지... 뭐하러 귀찮게 성경을 읽겠습니까?&lt;br /&gt;
&lt;br /&gt;
&lt;br /&gt;
십일조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lt;br /&gt;
&lt;br /&gt;
&quot;십일조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한다면 세금띠고 할 것인지... 세금 전으로 할것인지....&quot;&lt;br /&gt;
이런 도움 안되는 질문보다...&lt;br /&gt;
&quot;내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기에... 죽는 것도 유익이다&quot; 는 신앙고백이&lt;br /&gt;
우리에겐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하며 장황한 글을 마칩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바울을 닮아가는걸까요... 간단히 쓴다구 그러구... 너무 길게 썼네요..&lt;br /&gt;
이제 자러 가겠습니다.&lt;br /&gt;
&lt;br /&gt;
죽음조차도 유익으로 기쁘게 받을 수 있다면&lt;br /&gt;
사탄의 그 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lt;br /&gt;
&lt;br /&gt;
&quot;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그리고...오직 그리스도께 영광&quot;&lt;/div&gt;</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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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Michael Horton, &quot;기독교 핵심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핵심)&quot;</title>
      <id>http://www.worshipersam.net/zbxe/?document_srl=125</id>
      <published>2008-05-08T01:52:52-06:00</published>
      <updated>2008-11-05T04:49:58-07:00</updated>
      <link href="http://www.worshipersam.net/zbxe/?document_srl=125"/>
      <author>
         <name>Sam</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img src=&quot;./files/attach/images/67/125/0030000000000000032.jpg&quot; alt=&quot;0030000000000000032.jpg&quot; title=&quot;0030000000000000032.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300&quot; style=&quot;float: right;&quot; /&gt;기독교 핵심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핵심), 마이클 홀튼, 윤석인 옮김, 부흥과 개혁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 제목에 나타나는 것 처럼, 홀튼 박사는 이 책에서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의 중요성과 각 구절의 의미를 분석함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이 만들어진 시대와의 유사성을 주목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고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유사성은 바로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 관용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절대 기준보다는 평화롭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회, 그것이 신앙의 선배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단적인 신앙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최선의 길이다라고 주장했다면 그들이 그렇게 고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죄목이 &quot;무신론자&quot; 혹은 &quot;대역범&quot; 였다는 것은 신앙 선배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관용하지 못했던것을 증명해 준다.&lt;br /&gt;
&lt;br /&gt;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명함을 달고있는 다원주의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신앙의 선배들이 그들의 독단때문에 사회에서 버림받고 죄인으로 처형을 당했다면, 우리는 그 독단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평화롭게 잘 살아야 하는것인가? 그럴수 있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목숨을 바쳐 고백했던 그 신앙으로 돌아가 우리도 목숨을 걸고 그 신앙을 고백해야하는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한 질문을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그 대답으로 홀튼 박사는 사도신경을 가지고 나왔다. &lt;br /&gt;
&lt;br /&gt;
저자는 칼빈이 그랬던것 처럼 (혹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신경의 구절구절을 들어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했던 내용들을 분석한다. 하나님의 신성,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부활과 재림, 성령, 교회 등에 대하여 그 구절들이 포함한 내용들을 자세히 분석한다. 특히, 절대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취약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사도신경을 분석함에 있어 &quot;this is&quot; 에 중점을 주었다면, 홀튼 박사는 &quot;this is not&quot; 에 중점을 둠으로써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오해에 대한 교정을 제공해준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lt;br /&gt;
&lt;br /&gt;
우리에게 사도신경이란 신앙고백은 예배시간에 행해지는 순서의 하나로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주문을 외우듯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것을, 우리는 운율을 잘 맞추어 암송해야 하는 시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도신경이 예배시간에 있지 않은 교회는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본적도 없는 것은 아닌가. 나의 안에 그 고백이 있는가. 우리 교회안에 그 고백이 있는가. &lt;br /&gt;
&lt;br /&gt;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멸망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섬겼던 것이 그 멸망의 원인인 것이다. &lt;br /&gt;
&lt;br /&gt;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보증하는 그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고, 전인으로 고백하며, 지역교회로 고백하며, 보이지 않는 보편 교회로 함께 고백하는 그 신앙안에서,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영광스로운 예배안에 그 찬양안에 우리가 동참하는 광경. 상상만으로도 벅차오르는 이것을 우리가 누리고 있지 아니한가!!!&lt;br /&gt;&lt;/div&gt;</content>
               </entry>
   <entry>
      <title>Michael Horton, &quot;세상에 포로된 교회 (Beyond culture wars)&quot;</title>
      <id>http://www.worshipersam.net/zbxe/?document_srl=123</id>
      <published>2008-01-22T14:35:36-07:00</published>
      <updated>2008-11-05T03:31:49-07: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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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Sam</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세상의 포로 된 교회 (Beyond culture wars) by Michael Horton. 김재영 역, 부흥과 개혁사&lt;br /&gt;&lt;br /&gt;
&lt;img src=&quot;./files/attach/images/67/123/0100006895782_03.jpg&quot; alt=&quot;0100006895782_03.jpg&quot; title=&quot;0100006895782_03.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300&quot; style=&quot;float: right;&quot; /&gt;============================================&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 교회가 장로 대통령을 “선출해 내었노라”며 다소 흥분해 있는 이 시기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소수민족 이방인으로 미국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다른 하나의 공휴일 이상은 별로 의미가 없는 ‘마틴 루터 킹 기념일’ 에 이 책을 읽은 것은 또 어떤 뜻일까?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어떠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변증과 깊은 역사적 고찰을 담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인 홀튼 박사의 “세상의 포로 된 교회”. 이 책을 통해서 홀튼 박사는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혼돈하는 많은 사람, 특별히 복음주의라 자칭하는 사람들, 의 문제점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들을 지적하고, “오직 성경”, “오직 예수”라는 개혁주의적 해결방안들을 주기도문의 “렌즈”로 바라보고 있다. &lt;br /&gt;
&lt;br /&gt;
“In God we trust”라는 글이 쓰여있는 미국 달라 지폐들을 보여주면서, 혹은 새로 선출된 미국의 대통령이 성경책 위에 손을 올려놓고 선서하는 것을 예화로 들면서,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설명했던, 그래서 부럽지 않냐고,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던 그런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 기억 속의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아비뇽 유수”나 “카놋사의 굴욕” 에는 적대적이었지만, “신성로마제국”에는 관대했던 그런 마음이 비단 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그것이 결코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홀튼 박사는 철저하게 논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 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중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소망을 두기에는 충분치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정치 개혁에 대한 소망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영적인 것들을 빼앗기는지 조차 잊고 있다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하여 그리스도 인간 역사의 종국에 재림하는 그날까지 “구속 받은 문화” 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적인 우파나 좌파에 대한 구분보다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믿느냐”,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으며 우리의 공로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 시킬 수 있다고 믿는가”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후자의 의견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 펠라기우스적인 이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의견의 중심에는 결국 인간의 죄를 간과하고, 인간은 단지 도덕적인 개선이 필요할 따름이라는 이단적인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우리의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행동으로 보는 시각은 율법이란 것을 잘 지키면 자아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의 방법으로 보는 사조에서 크게 멀지 않다. 율법의 저주가 경히 여겨질수록, 복음의 의미와 그 기쁨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해석한 Peter Burger의 말처럼 배교의 본질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다. 정치활동을 통해서 율법을 법제화 하는 운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도래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공격하고 있는 배교인 것이다.&lt;br /&gt;
&lt;br /&gt;
작금의 복음주의는 세속적 휴머니즘을 강하게 공격하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세속주의에 깊게 빠져있다는 사실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살고 있으면서, 복음주의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 라는 구호에 대해서 반대하면서도 그 깊숙한 곳에 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의 도덕적인 개선과 이 땅에서의 행복을 위해서 이 땅 위에 “기독교 국가” 라는 것이 설립될 수 있는 오해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선조인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나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났던 인생의 중심적인 이슈는 인간의 도성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도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과는 멀어진 것이다. 모더니즘의 “이신론”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신론” 의 극단에 이르러있는 그들에게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홀든 박사는 문제점과 오해를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기도문의 해석을 통해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신론도 범신론도 아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는 것만이 모든 것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도덕성의 회복이 우선이 아니라 신학의 우선을 성토하고 있다. “너희가 신들처럼 될 것이다.” 라는 케케묵은 사단의 계략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기술의 진보가 그것을 더욱 현실적으로 들리게 하여 “자아실현” 이라는 것이 가장 큰 화두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모든 나라와 권위는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로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보편적인 신적 명령에 따라서 유지된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은 은총으로 다스리시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그 법이 모든 나라에서 선포되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택하신 백성, 즉 제사장 백성을 위한 법이었다. 자연법과 율법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amp;nbsp;&amp;nbsp;그러므로, 교회의 일은 세상을 심판하는 일도, 구원하는 일도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중세교회나 재세례파가 가지고 있던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이 불의한 것을 못 본 체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와 도덕을 넘어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할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논의를 “오직 성경”과&amp;nbsp;&amp;nbsp;“오직 예수”로 모은 홀튼 박사는 우리의 원천은 하나님에 대한 감정이나, 하나님에 대한 체험, 혹은 하나님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본받을 것을 이 시대의 복음주의에 촉구한다.&lt;br /&gt;
&lt;br /&gt;
이 책이 쓰여진 것은 1994년이다. 복음주의자들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클린턴 대통령 집권시절로 기억한다. 2001년에 잠시 몸담고 있던 선교단체에서 “경건한” 크리스천인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는 기도회를 개최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책에서 걱정하고 있던 “십자군 전쟁”의 형태와 같은 전쟁이 시작된지도 벌써 6년이 넘었다. 율법의 저주와 그것을 우리대신 받으신 예수는 온데 간데 없고,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눈이 빠져라 기다리는 하나님만 남아서 많은 교회에서 설교되고 있다. 과연 이 시대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들이 현실로 드러났고, 계속 드러나고 있다. “장로 대통령”을 선출해낸 대한민국, 그리고 한국 교회에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스도 인간 역사의 종국에 재림하는 그날까지 “구속 받은 문화” 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lt;br /&gt;
&lt;br /&gt;
===========================&lt;/div&gt;</content>
               </entry>
   <entry>
      <title>마틴 로이드존스, &quot;성령 하나님&quot;</title>
      <id>http://www.worshipersam.net/zbxe/?document_srl=121</id>
      <published>2008-01-17T13:31:01-07:00</published>
      <updated>2008-11-05T04:54:22-07: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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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Sam</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img src=&quot;./files/attach/images/67/121/0100007875103_03.jpg&quot; alt=&quot;0100007875103_03.jpg&quot; title=&quot;0100007875103_03.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66&quot; style=&quot;float: right;&quot; /&gt;마틴 로이드존스, &quot;성령 하나님&quo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에 이어지는 “성령 하나님”은 마틴 로이드존스의 다른 책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과 함께 성경교리 강해 시리즈의 한 권으로, 제목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관한 교리를 강의하는 것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간과하기 쉬운 성령님의 인격과 신성을 다룬 후에,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으로 시작하여 구원의 서정과 관련된 사역, 그리고 그의 사역의 결과 등을 논리적인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물론, 그 논리라는 것이 주관적인 인간의 관점에서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논리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 하다. 구원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논리대로 풀어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과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소위 “감성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우리가 느끼는 것,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잘 인지할 수 없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오히려 새롭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성령의 사역을 설명한다는 것은 곧, 구원론을 설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령 하나님 바로 그분이 구속을 적용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소위 구원의 서정을 하나님의 논리의 순서대로 강의하면서, 그는 몇 가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이것이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단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이 전 인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못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칭의는 받았지만 성화는 아직.” “중생은 했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직” 등을 예로 들면서, 그러한 변명들은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그리고 성령님이 사역하고 있는 그 구원은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 구원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 자체도 구원의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른 즉,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위안과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이 교리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믿음 자체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교리”와 통일되게 구원론을 강의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구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그 중앙에 위치 시킨다. 부르심을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중생을 그 선행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또한, 중생의 선행되는 과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한다. 이는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감각으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는 것이 가장 나중에 위치해야 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논리적 관점에서 이를 계속해서 풀어나간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단어의 특징상 우리 본질의 상실이라는 신비주의적 오해로 빠질 수 있지만, 그것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인 불변의 연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객관적인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인 주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칭의, 양자 삼음과 연관되어 있고, 후자는 성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중앙에 위치시킨 부르심의 반응으로 돌이킴을 설명하고, 이의 결과로 회개와 믿음에 대하여 설명한다. 돌이킴은 중생한 영혼의 첫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전 단계의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라면, 돌이킴은 우리의 행함을 요구하는 단계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시적은 돌이킴이나, 체험에 근거한 가짜 돌이킴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동반하는,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돌이킴의 결과로 설명된 회개는 이전에는 거절했던 것을 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전 인격적인 것을 동반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한다. 전 인격적이라는 것은 마음, 감정, 지성, 그리고 의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회개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후회와는 다르며,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기적인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킴의 또 다른 결과로 나온 믿음은 단순한 확률적인 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서 온 하나님의 선물이며, 감정, 의지, 확신, 그리고 헌신을 동반하는 초이성적 과정이다. 본질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죄인 된 상태를 깨닫는 것을 수반한다. 대체로 믿음은 확신을 동반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 생명의 시험, 그리고 성령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그는 칭의와 양자됨의 과정을 법정용어라는 표현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선언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공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며 공언하는 하나님의 법정행위를 칭의라고 정의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죄 용서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순종의 의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성화와는 구분되어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이며, 성화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칭의는 우리의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의 책임을 제거하는 것임에 반면에 성과는 우리의 내적 생명에서 발생하는 일이며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양자됨이라는 교리는 우리에게 권면과 위로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것의 증거로 성경의 말씀, 성령, 성령의 인도를 들었다. 양자됨의 결과로 보호와 위로 뿐만 아니라, 징계를 받게 될 것이며,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받게 될 것을 설명한다. &lt;br /&gt;
&lt;br /&gt;
그는 성화를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것이 이 구원의 전 과정의 진정한 목표라고 설명하며 그는 성화의 정의를 “성령님의 은혜롭고 지속적인 작용으로 그분이 죄의 오염으로부터 의롭게 된 죄인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죄인의 전체 본성을 새롭게 하며 또한 그로 하여금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라고 내렸다. 거룩의 의미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구분 (심지어는 무생물에 이르기 까지 적용되는 것) 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그 거룩함에 동참하기를 성경을 통해서 촉구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화가 받고 있는 여러가지 오해들, 즉 “중생처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경험적인 것이다” 에 반하여 로마서 6장에서 8장에 이르는 바울의 논지를 빌어 반박하며,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구원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이며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에 동참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내가, 아직 죄 속에 살고있는 나의 육으로 인하여 죄에 지배받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은 이미 죽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관계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lt;/div&gt;</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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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마틴 로이드존스, &quot;부흥&quot;</title>
      <id>http://www.worshipersam.net/zbxe/?document_srl=117</id>
      <published>2007-10-24T05:05:11-06:00</published>
      <updated>2008-12-18T08:59:42-07: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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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Sam</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quot;평양 대부흥 100주년 특별 보급판&quot;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물론, 이 부제가 약간의 거부감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 마틴 로이드존스의 &quot;부흥&quot; 이라는 책은 600페이지에 달하는 24개의 설교 모음집이라는 방대한 양은 둘째 치더라도 부흥을 바라는 그의 뜨거운 열정때문에 가볍게 한번 쭈욱 읽어버리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책이다 (실제로 1달정도가 걸린 듯하다.).&lt;br /&gt;
&lt;br /&gt;
책을 읽기전에 가장 염려했던 것 중의 하나는 로이드존스의 성령운동에 관한 입장에 대한 비평들이었다.&amp;nbsp;&amp;nbsp;(참고: http://en.wikipedia.org/wiki/Martin_lloyd-jones ) 그의 &quot;성령세례&quot;와 관련된 주장이 (즉 &quot;회심&quot;과 &quot;성령세례&quot;를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는 주장) 이 책의 제목인 &quot;부흥&quot;과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염려중의 하나였다. 몇몇 설교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그가 선택한 성경 본문과의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부분도 발견 할 수 있었다 (물론, 강해설교의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이니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의 잘못된 이해로 이해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일련의 설교들에서 너무나도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은 단 하나,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었다. 웨일즈 부흥의 100주년을 맞았던 그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그의 몸부림을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lt;br /&gt;&lt;br /&gt;&lt;br /&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files/attach/images/67/117/8990353513_1.jpg&quot; alt=&quot;8990353513_1.jpg&quot; title=&quot;8990353513_1.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72&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lt;br /&gt;&lt;/div&gt;
&lt;br /&gt;
*&lt;br /&gt;
&lt;br /&gt;
책 뒷표지에 큼지막하게 써 있는 것 처럼, 마틴은 &quot;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quot;라고 정의하며, 그 부흥에 관하여, 즉 그 목적과 과정과 결과에 관하여, 성경 여러 사건에 나타난 예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땅에 부흥이 필요한 이유와 그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 마틴은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막힌 우물을 다시 파는 장면을 상고하며 부흥의 장애물에 대하여 논하였다.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웠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물을 막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quot;쓰레기&quot; 가 우리에게도 존재하며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지혜나 수단에 입각하여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성경, 혹은 교회사) 에서 발견하려 노력했다.&amp;nbsp;&amp;nbsp;&quot;이삭이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quot; 라는 것을 근거로 우리가 성경과 교회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부흥의 원천을 막아버리는 &quot;쓰레기&quot;로 그는 불신앙, 오염된 교리, 일그러지거나 죽은 정통신앙, 영적 무력증 등을 제시했다. 불신앙이나 오염된 교리가 부흥을 막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정통신앙 자체도 부흥의 원천을 막아버리는 &quot;쓰레기&quot;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도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신칭의, 중생등의 본질적인 교리를 알고 있는 것을 정통신앙 (혹은, 복음주의) 이라고 정의한 후에, 일그러지거나 죽게된 정통신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한다. 일그러진 정통신앙이라는 것은 교리를 알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을 포함하며, 죽게된 정통신앙은 그 교리만으로 만족하여 다른 어떤 것도 필요없다고 만족해 버리는 신앙을 말한다 (참고: 나성남포교회 한성윤 목사 2007년 4월 7일 설교 &quot;살았으나 죽었도다 - 교회 (6)&quot; http://www.lampchurch.org/index.php?pagemode=sermon&amp;amp;num=453 ).&amp;nbsp;&amp;nbsp;&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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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막고있는 여러 원인들에 대한 설명이후에, 그는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의 특징에 대하여 묘사하며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는 것이 부흥이고,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갈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갈망보다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이 더 중요하다고 정.확.하.게. 주장한다). 모세와 이사야의 기도에서 부흥, 즉 하나님의 일하심 그리고 그의 영광, 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담은 기도를 설명하고, 우리가 그것들을 갈망할 수 밖에 없는 자임을 역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촉구한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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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부흥 = 교인수&quot; 라는 공식에 빠져있는, 그래서 그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 효과적이고 사람들의 &quot;흥미&quot;를 끌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가 잠시 멈추고 도데체 그 이루려고 하는 부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부흥이 일어남과 함께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들에 빠져서 &quot;염불보단 젯밥&quot; 이라는 속담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시대의 교회들이 잠시 멈추고 도데체 왜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들을 보고싶은지 되 물어야 할 것이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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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그 반대의 극단에서, &quot;나는 예수를 알고, 그분의 사역으로 인하여 내가 의롭다 함을 입고, 거듭남을 입었다,&quot; 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도 그 안일함에서 잠시 깨어 올바른 교리를 정말 알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위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갈망의 부재에 대하여 자문 해야 할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 글을 읽은 나 자신은, 후자의 극단에 빠질 가능 성이 높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가진 교리에 대한 지식으로&amp;nbsp;&amp;nbsp;다른 약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quot;지식&quot; 을 쌓는 것에 대한 흥미로 성경을 공부하는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quot;부흥&quot; 이 없이는, 나는 그런 사람이다. 어느날 문득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게 다가와 견딜수 없이 기뻐하는 것이 내 삶에 없다면...... 찬양을 하다가 나의 죄인됨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순간이 없다면...... 혹시 나는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quot;아브라함의 우물&quot; 앞에 앉아서 갈증에 허덕이고 있으면서도, &quot;나는 이 우물안에 물이 있는 것을 알고있고, 언제가는 내가 먹을 것도 알고있으므로, 나는 목이 안마르다....&quot; 라고 긍정적인 상상으로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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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마틴 로이드존스, &quot;복음의 핵심,&quot; 199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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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7-09-22T01:45:42-06:00</published>
      <updated>2008-11-05T04:56:55-07: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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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img src=&quot;./files/attach/images/67/114/9788985312011_200.gif&quot; alt=&quot;9788985312011_200.gif&quot; title=&quot;9788985312011_200.gif&quot; style=&quot;&quot; /&gt;마틴 로이드존스, &quot;복음의 핵심,&quot; 양무리출판사, 이중수 역, 1991.&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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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 존스의 1948-1949년의 설교모음집인 &quot;복음의 핵심&quot;은 마태복음 11장의 강해설교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가졌던 근대 철학적 사유들의 오류를 처절하게 보여주었던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직접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복음을 설명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설교한 내용입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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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책이나 사상도 그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는 사상이나 문화, 생활풍조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설교자나 저자들은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들게 마련입니다. &quot;복음의 핵심&quot;에 편집되어 있는 그의 설교에서도 그와같은 고민을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quot;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큰 전쟁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놓아두느냐?&quot; 라는 질문등 이겠죠. 역설적으로, 어떠한 책이나 사상도 그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 증명되는 부분이도 합니다. 그러나, 마틴은 그러한 고민들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며,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quot;독단&quot;적인 결론을 마태복음 11장에 나타난 예수의 논리로 설교합니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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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설교는 본문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인 &quot;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v. 3)&quot; 라는 질문 뒤에 있는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추론으로 시작됩니다. &quot;나로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있다 (v. 6)&quot;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대답을 통하여, 요한과 그의 제자들 뿐 아니라 이 설교의 청취자들이었던 2차대전의 경험자, 그리고 거짓된 평안에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까지 &quot;이성적&quot;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와 그의 사역에 대한 어려움들에 대하여 분석합니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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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은 그 어려움을 3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즉, 예수의 인격체, 예수에게 일어난 일, 예수가 하는 일 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이며, 각각 성육신, 십자가, 그리고 하늘의 일에 집중된 예수의 사역으로 대표됩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실족되지 않는 자가 복된 자, 즉 복음안에 있는 자라고 주장하며 그를 위하여 예수에게 나아 갈것을 성토합니다. 그는 더 나아가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복음임을 강조하면서 예수께 가지않고는 우리가 복음의 핵심을 알 수 없고 그 안에 참여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예수께 나와서 복음의 핵심을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서 세상 어떤것도 다 버리는 마음을 가진 침노하는 자 (v. 12) 가 된다고 설명합니다.&lt;br /&gt;
&lt;br /&gt;
그 어려움들에 실족하여 넘어진 불신에 대하여 자기의 이성과 기준으로 판단하고(v 16-19)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v. 20-24)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 (v. 25-27) 만이 그 어려움들에 실족하지 않고 복음을 잡을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그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 조차도 &quot;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v. 27)&quot; 외에는 그와 같이 될수 없다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실족치 않은자, 즉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여 그 복음에 참여한 자들이 누리는 기쁨과 참된 안식에 대하여 말하며, 복음의 핵심이 그 어려움들을 &quot;이성적&quot;으로 이해하거나 &quot;비이성적&quot;으로 대하지 않고 &quot;초이성적&quot; 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대에 있다고 역설합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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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처럼 책상위에 쌓여있던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집중에 처음으로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 &quot;복음의 핵심&quot;. 기대가 컸던 만큼, &quot;독단&quot;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뿜어대는 그의 복음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 하루에 한 챕터씩만 읽기로 한 결심을 자꾸 흔들리게 했습니다. &lt;br /&gt;
&lt;br /&gt;
특히 이 책에서 언급했던 3가지 어려움들이 시대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늘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질문의 내용들은 달라지겠지만 말이죠.)&amp;nbsp;&amp;nbsp;예수를 복음의 핵심 위에서 만나기 위해 세례요한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그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실족했으며 복음을 거절한 것을 교회사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lt;br /&gt;
&lt;br /&gt;
이에 반하여,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흐름속에서 그런 어려움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규모는 점점 커져가고 &quot;크리스쳔&quot; 이라고 크게 명패를 가슴에 내어 붙인 사람들이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까지 오르며, 그것이 좋은것이며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lt;br /&gt;
&lt;br /&gt;
누가 말하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다시(?) 일어난 것일까요. 과연, 예수의 복음의 핵심이 던져주는 그 엄청난 어려움들을, 예수만을 의지하여 온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싸워나가는 것일까요. 사실 두려운 마음이 더욱 듭니다, 소위 &quot;부흥&quot;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한국교회가 예수의 사역들을 경험했던 고라신,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자리에 있지는 않은지요. 피리불며 곡하는 노래를 하기를 강요하는 아이들의 자리에 있지는 않은지요,&lt;br /&gt;
&lt;br /&gt;
아니. 다른 누구를 이야기 하기 전에 내 자신을 봅니다. 그 어려움들을 내 자신의 이해력으로 이해하며 살지 않는지 말이죠. 나의 기준으로, 나의 소견에 옳은대로 예수와 그의 사역을 이해하며 살지 않는지 말이죠.&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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